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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셉션, 국내 노벨상 부재와 비슷한 이유

by At Information Technology 201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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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철이 지난 영화라고 하여도 영화에 대해 내 지론은 항상 변함이 없다. 볼륨을 키우고 프레젠테이션 스크린을 내려 소규모 극장의 분위기에서 명작을 다시 감상한다면 그 영화는 언제나 감탄을 절로 지어내게 한다. 이를테면 나온 지 꽤 된 타이타닉을 명작이 아닌 망(亡)작이라 표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 그렇다고 영화에 대해 멋진 비평을 하거나 평론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 다루려는 영화는 최근에 개봉하고 상영한 영화가 아닌 1년이 지난 명작 영화 ‘인셉션’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루어 보려 한다.


‘인셉션’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을 2번이나 스크린을 통하여 상상력을 시각화한다. 꿈속의 꿈(Lv2)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었던 잠재의식을 훔쳐 와서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잠재의식이 자신에게 생각과 의식을 심는 인셉션의 행위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코브가 사이토의 제안을 받아들인 일을 수행하기위해 그 준비과정은 상당히 빠르게 내용이 전개된다. 표적의 투사체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역설 및 미로의 구조를 담당하는 설계자를 시작으로 하여 Forger 역할을 비롯하여 깊숙한 꿈(Lv3)을 가능하게 만드는 약제사까지 등장하게 된다.


‘인셉션’의 처음과 끝의 구조는 림보의 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Lv3에 이르는 깊숙한 꿈에서 Lv4의 상태인 림보로 떨어진 사이토와 코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코브는 지난날 그의 배우자였던 맬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극적으로 림보에서 탈출을 하였고 길고 길었던 고독의 여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물론 이론과 영화의 괴리감이 있듯이 ‘인셉션’ 또한 허구를 바탕으로 한 과학소설의 하나인 명작으로 거듭났다. 영화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인셉션’에서 설명이 되지 않거나 모순적인 것들은 빠른 전개를 통하여 영화의 구성을 하였다고 쓰디 쓴 소리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다루려는 것은 ‘인셉션’의 영화 자체가 아니다. ‘인셉션’을 흥미롭고 신비스럽게 만든 과학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 인셉션은 과학의 본질을 잘 다루었던 영화이다. ‘호접지몽’과 같은 사자성어가 있듯이, 인셉션은 꿈의 신비함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데서 출발을 하였다. 영화감독은 여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사실을 재미있게 그려놓았다. 이를테면 림보의 예가 대표적이다.


Ⅰ) 말도 안 될 것 같은 해외의 영화 인셉션과 국내의 노벨상 부재의 비교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비교로 보일 수도 있다. 대작인 영화를 우리나라에 노벨상이 없다는 사실과 비교하려드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나 해보겠다. 왜 우리나라에는 인셉션 같은 영화가 없는 것인가? 이 질문과 비교를 한다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인셉션은 과학의 흥미 그 자체, 그 사실만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부분은 자연과학과 반대가 되는 부분으로 기초과학의 특징을 잘 살린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국내는 어떤가? 인셉션의 ‘인’도 어느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물며 노벨상은 있는가? 기초과학의 접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그것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할 기회 또한 없다. 그저 정해진 코스대로 어떠한 사실을 배운다면 그 사실은 다음 것을 배우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지나지 않는다. 인셉션을 보고 멋지게 해석을 할 수는 있어도, 노벨상을 탄 우주이론이나 준결정에 대한 이론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직접 Create 하지는 못한다.


Ⅱ) 명작 과학/SF영화, 노벨상 없어도 먹고 살기 좋을까? 근시안적인 사고일 뿐

 분명히 지금도 국내 교육과정은 물리,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에 대한 투자와 관심만 있을 뿐이다. 결국 학생들이 자연과학을 배워서 Pass의 용도로 사용하고 그것을 또 다시 학습하기만 한다.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어떠한 고려와 염두도 하지 않은 채 가까운 것만 주워 내 지식으로 만들기 과정만을 반복하고 있다. 설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틀려도 그 자리에서 상대성 이론을 배우고 학습할 수밖에 없다. 변화되는 환경에서는 그다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연과학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연과학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공학적 배경의 기본적인 Basic을 구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어떤 구성을 간단히 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곳에서 많이 쓰이는 자연과학의 유용성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는 호기심을 유발할 거리나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자연과학은 그저 물질적인 것을 발명하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용도일 뿐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성에 대해 적응하기 위해 기초과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자연과학의 투자에 앞서 기초과학의 관심과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자연과학의 투자만을 고수하면 작게는 명작의 영화와 노벨상을 잃게 되고, 크게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불러온 사회적 병폐를 야기하게 된다. 발전이 없고 어느 곳에서도 혁신을 찾아볼 수 없는 멈추어 버린 사회를 뜻하게 된다. 이 사회는 애플이 만든 제품을 타사에서 카피캣을 만들어 내놓이듯이 대외적 혁신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Ⅲ) 영화 인셉션이 없는 것과 노벨상의 부재는 비슷한 이유가 아닌 같은 이유이다.

 결국은 국내의 인셉션과 노벨상의 비교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적절한 비유였다. 기초과학이 상상력을 자아내고, 그 상상력은 혁신과 변화의 다양성에 대한 대처의 밑거름이 된다. 틀에 박힌 과학기술 R&D의 방향과 그 방향의 개선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임시조치일 뿐이다. 정말로 명작영화를 만들고 노벨상을 얻으려면 임시조치가 아닌 완전한 개혁을 요구해야 할 때이다.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위한 기초과학의 방향은?’의 포스트에서 짤막하게 다루었듯이 본격적으로 SAS 교육 프로그램의 도입과 투자가 더 시급한 문제이다.


우리나라 SF영화가 해외 SF영화에 비해 흥행이 부진하고 인기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 이유로는 우리나라의 SF영화는 재미의 맛이 없고 해외의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특히 과학영화를 비판을 하기 전에 정말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단순히 재미의 유무로 과학영화를 평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과학에서는 더욱 그렇다. 과학/SF영화와 노벨상을 수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있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응용된 자연과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주는 기대는 애초부터 헛된 바람이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영화를, 다른 한 편으로는 노벨상을 수여받지 못한다고 떠들썩거리고 있다. 뿌리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전까지 힘 있는 권력자들이 논란거리를 만들며 토론을 하는 것은 그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인 문제를 찾아야 하고 그것을 픽스해야 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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